2021 9 1

 

어머니 장례식

 

어제 아침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오늘 교회 여러 성도님들로 부터 계속 전화가 온다. 텍스트와 이멜로, 특히 어머니에게 반찬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분들은 적극적으로 장례식 일정을 물어온다. 그런데 대답을 들으면서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다. “장례식 벌써 치렀는데요라고 하면 다들 말문이 막힌다. 어머니가 지시한 간이 장례식이라고 설명을 드리면 하도 황당하기에 이런저런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대화가 종료된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좀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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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와서 몇 년이 지난 1979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교회에서 최초의 장례식이었다. 당연히 미국에서 장례식에 참석한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식의 장례식도 또한 보편화 되지않은 시기에 대학교 1학년짜리 아들이 영어도 못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장례식을 치루려니 황당하였다. 그래도 몇 년은 일찍 미국이민 생활하신 분들이 나름대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움을 주시는데 이것 또한 불편하고 별로이었다. 그래도 나보다는 영어도 잘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이니 무작정 따라가다 보니 장례비용이 장난이 아니었다. 관부터 시작해서 우선 나무로 만든 것과 쇠로 만든 것이 있는데 어수룩한 대학1년생과 영어도 못하는 슬픔에 쌓인 과부에게 비싼 관을 권장해서 파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었다. 확실히 기억은 못하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싼 쇠로 만든 관에다 방수옵션과 혹 나중에라도 한국에 통일이 되면 아버님 묘를 이장 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계획으로 50년 동안 썩지 않는 진공식 관으로 결정을 했다. 바로 물어오는 것이 꽃은 준비가 됐느냐? 당연히 준비 안된 상태에서 그들이 연결해주는 꽃집에서 관을 덮는 것과 양쪽에 놓는 꽃 그리고 각 사람들이 하나씩 들고 관에 올려 놓을 수 있는것 등을 합쳐보니 천여 불이 훌쩍 넘는다. 당시 집값 월부금이 $300 정도이니 상당한 꽃값 액수였다. 교회에서 장지까지 가는 동안 필요한 오토바이 에스코트를 권장한다. 이유인즉 장례행렬이 끊어지면 손님들이 불편해하고 또한 하관예배 시간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자동차 충돌 사고가 나면 우리에게 책임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에 대한 비용도 천여 불 지불했다. 플러스, 관을 땅에 묻으려면 관을 보호할 콘크리트 벽을 구입해야 한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정사진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미국 올 때 사용한 여권사진을 가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겨우 사진관에서 사진을 다시 사진찍어 확대해서 뿌연 사진을 사용했는데 이것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장례를 준비했는데 또하나 넘어야 될 장벽이 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직후 임종예배는 교회 목사님이 병원까지 오셔서 인도해 주셨다. 그런데 장례식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물어본다. 장례식 전 며칠간 관을 열어놓고 식구들이나 친지들이 가서 누워있는 시신을 열람할 수 있다고그리고 문 앞에는 방문객 이름과 사인을 남길 책과 펜도 구입해야 한다고. 남들이 한다고 하니 우리도 이틀 동안 관을 무작정 열어놓기 뭐해 어머니와 내가 교대로 빈방을 지켰다나중에 우리 모자가 내린 결론은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고다음 날 관을 교회로 가지고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것이 바로 장례식과 발인예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용되는 운송차량은 미국차로는 최고급이라는 캐딜락. 이것도 모자라서 식구들이 뒤에 타고 가는 차도 따로 추가신청을 해야하고 뒤에 따라가는 차들 유리창에는장례행렬이라는 딱지를 부치게 되있는데 이것은 에스코트 비용에 포함이 되있다고 인심 쓴다. 그리고 식구가 원한다면 집 앞을 한 바퀴 돌고 갈 수도 있는데, 당연히 추가 비용.

 

그 다음에 장지에 도착해서 땅에 묻기 전에 드리는 예배를 하관예배라고 하는데 특별히 다른 것은 없고, 비슷한 설교와 찬송 그리고 마지막에 꽃을 하나씩 관 위에 놓고 지나가면서 인사이것을 하면서도 어린 나의 생각에는 왜 아침에 교회에서 다 인사하고 울것 다 울고 기도 다하고 설교도 다 들었는데 또 반복하나? 좀 의아했었다.

 

준비 과정으로 돌아가서, , , , 에스코트, 차량 등등 다 끝이 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비석 준비가 됐냐는 것이다. 당연히 준비가 안되어 이리저리 옵션에다 당시에는 컴퓨터로 한글을 쓸 수가 없었기에 담임 목사님이 손수 붓으로 글을 써주셔서 이것을 전해주느라고 GPS없이 지도를 펼쳐들고 산호세 다운타운 근처를 헤맨 기억(악몽)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석 중간에, 아니면 따로 꽃꽂이 화분을 구입 하겠느냐? 라고 물어올 때 진짜 울고 싶었던 심정, 이제야 처음으로 나눠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름대로 다음에 장례를 치루는 사람을 돕기 위해 도우미 회사까지 차려서 한동안은 활발하게 뛰었다. 지금도 당시 사용하던 인터넷 사이트가 살아있다. www.ready4naeil.com내용도 거의 정확하다.

 

이처럼 아들이 장례식 간소화 운동을 오랫동안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10여 년 전부터는 자신이 앞장서서 친구들 장례식을 간단하게 하라고 조언하신다. 그리고 거창한 장례식을 참석하시면 항상 하시는 말씀이돈 지랄들이야, 돈 지랄앞으로는 장례식 같은 것 안 갈 것이고 또 내 장례식은 아주 간단하게 할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정작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장례식을 어떻게 할까 동생들과 이야기를 하니까 어머니가 아주 명확하게 지시를 해놓고 가셨다. 새벽에 숨이 멎으셨기에 여동생 둘이 어머니가 지정해놓으신 옷으로 갈아입고 새벽예배 인도 끝나신 담임목사님에게 연락해서 실버사역 담당 전도사 참석 끝. 여기에 동생과 의논해서 안수집사님 한 분 더 추가해서 식구들과 어머니 마지막 길을 위해 예배를 드렸다.

 

이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속 전화로 장례식 문의가 들어온다. 그리고 나의 설명을 듣고는 항상 반응그래도 마지막 인사도 드리고 꽃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산호세 한인침례교회를 중심으로 참 발이 넓으셨던 어머니, 우리 자식들은 어머니를 놀리기를 K-CIA (중앙정보부)라고 했다. 교회에 돌아가는 실정은 물론 특히 자신이 전도한 교인들의 상황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관계를 중요시하셨다. 당연히 많은 분들의 사랑도 받으셨다. 어제 좀 들여다본 어머니 냉장고에는 교회분들이 만들어준 음식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처럼 받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한데 번거로운 장례식, , 조의금 등등 특히 코로나 때문에 어수선한 이때 어머니의 장례 방식이 너무 멋있다. 만약에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리고 손자 손녀가 다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 때 할머니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추모 예배를 가질 예정이다. 교회 중심으로 가까운 분들 초청해서 옛 이야기 나누며 특히 주님이 거저 주신 사랑과 구원 등을 나눴으면 한다. 그리고 만약에라도 꼭 꽃이나 조의금을 전해주시려는 분들에게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응하셨을 것이다. “돈 넉넉히 가지고 와서 교회에다 선교헌금이나 구제헌금으로 하면 아주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