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

 

귀가하신 어머니

 

많은 예수인들이 기도나 찬송을 부를때하나님 ”, “고향”, “천당혹은본향 가고 싶다고들 한다. 그런데 정작 때가 되면 막바지에 약이란 약은 실험하고,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 먹고,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한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특이하셨던 같다. 4기라고 확정을 받으셨는데 오히려 태연스럽게 담당 의사에게나는 특별한 치료는 끝났으니 하나님 보러 준비다 됐고 살려주시면 좋고 이대로 가도 좋다라고 완전치 못한 영어로 또박또박 이야기 하신다. 불과 전만 해도 운전도 하시고 숨이 차고 힘은 들어도 얼마든지 살아보려고 노력은 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웃으시면서 의사에게 지금까지 치료해 고맙다 인사까지 깍듯이 하시고 병원에서 나오셨다.

Har+3kids

아마도 42 전에 먼저 보내신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버님도 조금은 돌연변이였다. 육이오가 터지고 이북에서 틴에이저로 남한에 내려와서 친척도 없고 배는 고프니 총알이라도 먹고 살겠다고 해병대에 자원하셨다. 휴전 직후였기에 전쟁을 직접 치르시지는 않았지만 이북에서 내려온 고아들만 모아서 만들었다는 TTU 상륙/수색중대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해병 훈련대장에게 2호의 우등상장을 받으셨다.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 오셔서도 자신의 주먹만을 믿고 살아오신 분이 질병인 간염과 투병하시다가 스텐퍼드 대학병원에서 6개월 이상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다. 투병 막바지에 나에게 운전을 시켜 주중에 병원에서 잠시(몰래) 나와서 산호세 한인침례교회에 오셔서 (지금의 구관) 강단 앞에 엎드려 우시면서 기도하시고, 목사님과 대화를 하시면서 자신도 예수인이 되겠다고 하셨다. 이때를 위해 어머니도 쉬지않고 기도하셨고, 교회에 많은 분들이 중보기도를 해주셨다.

 

아무튼 어머니는 깡이 많은 분이었다. 자신이 결정하면 앞뒤 안 가리고 전진하신다. 깡뿐이 아니고, 어떤 때는 무식이 용감이라는 것이 적용될 때도 있었다. 밤중에 일을 마치고 오는데 타이어 바람이 빠진 상태에서 교회에 가셨다가 아침에 집에 오셔서 잠자는 나를 깨우시더니 차 좀 나가서 보라는 것이었다. 운전을 하는데 좌우로 핸들 조정이 안된다고. 밤이었기에 나가서 보시기는 뭐하고 교회 기도모임에 시간 맞춰 가야 하기에 그냥 갔다는 것이다. 내가 나가서 보니 타이어는 찢어져 없어지고 쇠로 굴러오신 것이었다. 목적지 교회, 그리고 집에 오시면서 좌우로 운전이 안되는 것도 상관없이 그저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무대포 우리 어머니.

 

항상 자신이 김장김치, 고추장, 간장 그리고 된장 등을 만들어 드시는 것은 물론 주위에 많은 분들에게 나눠주셨는데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남아있다. 된장과 간장 담기 위해 메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콩을 삶아 절구통에 찧어야 하는데 이것은 몫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자꾸 미루다가 하루는 집에 와보니 어머니가 앞에 Driveway 커다란 합판을 깔고 쌀자루에다 비닐을 씌워서 콩을 넣으시고 묶은 후 뒷바퀴로 앞뒤로 오가며 메주를 만들고 계셨다. 차도 보통 차도 아니고 최고로 무거운 Fleetwood Cadillac 으로 메주를 만드셨다.

 

일단 무엇을 하기로 결정하시면 뒤돌아보지 않으시고 후회없이 앞으로 직진하시던 어머니, 하나님 품에 가시기로 결정하시더니 약도 끊고 부지런히 떠나실 준비를 하셨다. 멀리 시카고와 와싱턴에 사는 손자와 손녀가 몇 주 전에 잠깐 다녀간 만으로 충분하다고, 비디오 통화도 필요없고 장례식도 필요 없이 빨리 세상 뒤로하고 가시겠다고 서둘러서 떠나신 어머니,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는 주님 품에서 아버님과 재회하셔서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세요. 우리도 나그네 생활을 정리하고 진짜로 좋은 주님의 집으로 귀가할게요.